사도행전 14:1-28 이고디온과 루스드라에서의 일
이고디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 그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면서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께서 그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셨다. 본문의 구절 가운데 바울과 바나바가 한 일로 보이겠지만 주를 힘입어,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라는 표현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예수께서 하시고 계셨다. 주를 힘입었다는 표현은 주를 신뢰하였다는 표현으로 대치할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주님을 신뢰하는가?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나의 삶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는가? 어떻게 나타나길 원하는가? 주님을 신뢰하는 삶, 주를 힘입는 삶을 살게 하소서. 주를 신뢰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도들이 주를 신뢰할 때, 표면적인 핍박이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바울과 그의 일행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고, 더 나아가 관리들과 모의하여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고니온에서는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미리 알고 도망하여 루스드라와 더베 근방으로 갔다. 떄로는 정면으로 핍박에 맞서 감내해 내지 않고 피하였다.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하여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였다. 이 일로 무리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그리스 신 중에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오해하는 일이 생기면서 사람의 모습을 한 신으로 대하는 일이 있었다. 초자연적인 일이 생겼을 때, 루스드라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반응이었다.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을 다시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후 어둠의 세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절 말씀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디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자 전에 말씀을 들은 무리가 바울을 돌로 쳐 죽은 줄 알고 시외에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퍽치기를 당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 이름으로 그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이름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수법도 아주 악날하고 어둡다.
다행이 바울은 죽지 않고 살아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 예수를 믿게 된 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믿음에 머물도록 권하였다. 그 후로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보고하였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사람이 일하는 방식과 다르다. 때론 무모하기 짝이 없다. 위험한 곤경에 처하게 될 때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다. 그 길을 걷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주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믿음 가운데 굳건히 서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의 길을 가는 자에게 요구된다. 바울은 새롭게 세워진 교회의 장로들을 택하여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의탁했다. 많은 환난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이 충만하면 저절도 되는 것인가? 저절로 되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상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드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결단이 매일 매일 요구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에 오늘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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